민주주의 속에서 시민들의 정치 성향이 다른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 한마디로 관용의 사회가 아니다. 이러한 것으로 인해 정치 혐오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정치밖에 없다. 끊임없이 설득해야 한다. 우리 모두 관용의 정신이 필요할 때다.


이민재🐬 - 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함규진 옮김, 와이즈베리

샌델의 착각, 정치의 착각

김정희원의 칼럼을 바탕으로 샌델이 말하는 ‘공정’과 해결책에 대해 비판한다. 운과 겸양의 개념이 현실 설명력과 정치적 활용성 측면에서 가지는 한계를 지적한다. 우리가 대응해야 할 구조를 생각해보고, 우리 정치가 그에 응하지 못하고 있음 역시 적시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어느 집 책장에나 볼 수 있는 책이 될 거라고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 파급력은 지금까지 이어져, ‘공정하다는 착각’은 한국 능력주의 논쟁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까지 기고한 글을 통해 알 수 있듯, 그의 키워드는 운과 겸손이다. 누구나 운명의 우연성을 피해갈 수 없기에, 누구도 자신의 성과를 자신만의 오롯한 노력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이를 인지함으로써 겸손과 존중이 피어나 공적 삶이 구현된다는 것이 책의 핵심이다.

그러나 김정희원은 샌델의 주장이 단순히 보수적인 것을 넘어서, 능력주의 비판 담론의 개인화, 보수화를 가져왔다고 비판한다.₁ ‘운’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작금의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가? 나아가, ‘운’과 ‘겸손’은 정치적, 실천적으로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개념인가?

능력주의는 구조적 불평등, 차별, 그리고 행운으로 구성된다. 샌델은 이중에서 행운에 유독 초점을 맞춘다. ‘운’은 무정형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은 확률적이며 운과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개념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 되어 범주와 서사를 잃고 표류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운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은폐한다.

이는 첫 번째로 신자유주의와 이를 지탱하는 금융자본주의가 재산권을 극대화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인 제도와 실천의 집합체라는 점,₂ 그리고 현대사회가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채용한 결과 불평등을 재생산한다는 점을 가린다. 삼성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운이라고 하더라도 그 운의 이전과 이후에 재벌이 형성되고 또 유지되는지, 마찬가지로 제프 베이조스가 220조 원이라는 가공할 재력을 가졌는지, 운은 설명하지 못한다. 구조만이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샌델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다층적인 계층들, 그중에서 사회적 약자의 정체성이 받는 차별을 단순히 운과 정서 문제로 치환한다. 즉 행운에는 집단적 서사가 없다. 그래서 연대로 나아갈 방도 역시 없다. 따라서 개인적 겸양은 공동체와 연대로 인도되지 않는다. 비정규직으로서, 여성으로서, 장애인으로서, 청년으로서 뭉칠 수는 있지만, 이 모든 것을 통틀어 ‘단순히 운이 나빴던 사람’으로서 뭉칠 수는 없다. 당연히 정치적 다수를 형성할 수도, 정치적 행위를 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박탈감과 같은 대중 정서에 기댄 비판은 누구나 반감 없이 받아들이기 쉽고, 그 때문에 대안적이지도 급진적이지도 않다’는 김정희원의 지적은 적확하다. 박탈감 닷컴₃을 보라. 빼앗겼다는 대중정서는 정작 누가 자신을 대표할 수 있고 누구와 연대할지에 대해 무지하여 형성적 기능이 없는 채, 그저 집단적 구시렁거림으로 남아있다.

춘향전을 다시 읽어보자. 장원 급제한 몽룡이는 고향에 돌아와 춘향이에게 치근대던 변 사또를 응징하고 춘향이와 행복하게 산다. 이 이야기는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몽룡이처럼 성공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즉 능력주의적으로 읽혀왔다. 우리가 말해야 할 것이 과연 변 사또나 이몽룡의 태도 개선이겠는가. 우리는 장원에 급제해야만 사회 문제에 대응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왜 춘향이는 과거를 준비할 수 없었고, 왜 몽룡이에 의해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인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시대의 또 다른 춘향이와 몽룡이에게 이에 저항하자고 손 내밀어야 한다.

결국 정치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정치는 그렇지 못하다. 이견을 적폐로 몰아 제거하려는 시도는 국민 대다수가 참여했던 ‘촛불 연합’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정치 엘리트 편향적인 이슈인 검찰개혁에 매몰되어 노동, 환경, 성평등, 금융 자산과 부동산 등 자산 불평등, 교육 분야에서 무참히 실패했다. 그리고 그 검찰개혁마저 실패했고, 개혁의 명분은 온데간데없이 특정인에 의해 사유화되었다. 정의를 독차지했다는 오만과 무능이 결합한 결과는 보통 사람의 어려운 삶이다. 물적 조건이 어려워지니, 만나면 요행을 바라며 코인이나 주식 얘기만 하는 세상이 됐다. 사람들은 사나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번 외쳐야만 할 것이다.

결국 정치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Ref)